250421 겨울

Date/ 2025. 4. 21. 09:18







창문 밖에서 새하얀 빛이 새어 나왔다.
 
 
 
눈이다!




눈이 내릴 때면 하던 것도 잊고 그저 바라만 보게 된다. 내리는 눈은 아주 작은 정령이라고 말해도 될 만큼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런 감상은 어릴 때와 많이 바뀌지 않았다. 이만큼 눈이 오는데, 그 녀석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연락을 좀 받으라던 잔소리에 자주 들고 다니지도 않던 핸드폰을 내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 지도 꽤 되었다. 충전은… 생각날 때마다 하지만 그 녀석은 그것도 맘에 안 드는 듯했다. 그래서 뭐. 충전하든 말든 내 마음인데! 나에겐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꽤 큰 결심이었다. 
 
그 녀석과 회사 사람 몇 명의 연락처만 저장되어 있는 핸드폰. 하지만 회사 사람들은 내가 연락을 잘 받지 않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연락은 편지나 서면으로 하는 것이 전부니까, 사실상 이것으로 연락하는 것은 그 녀석 하나뿐이다. …갑자기, 눈이 오면 눈사람이나 만들자고 한 생각이 났다. 아마도 내가 말한 것 같았다. 음, 그때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라고 했던가? 나는 그 녀석의 연락을 기다리며 몇 분 더 앉아 있었다. 



…연락이 안 오는 걸 보니 아마 잊어버렸나 보다. 



그 이상 기다리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기에 그냥 집으로 가자고 마음먹었다. 건조하고 추운 날 주먹질을 했더니 온몸이 다 쑤셔오는 느낌이었다. 추위 탓에 움직임이 둔해져서 그런가… 더 많이 맞기도 했고. 역시 여러모로 겨울은 힘든 계절이다.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창고에서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이래서야 정말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주변엔 정신 못 차리는 얼간이들이 하나, 둘, 셋…. …버리고 가자!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새하얀 세상으로 발을 내디뎠다. 신발에 묻은 피가 눈을 더럽게 녹였지만 딱히 신경은 쓰지 않았다. 난 눈을 내리는 것만 좋아하지 이미 쌓여버린 눈을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이미 가치를 다 해버린 눈은 내겐 걷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설렁설렁 눈길을 걸으며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 녀석이 준 라이터를 손에 들었고, 그 라이터로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불은 순식간에 담배를 태웠고, 내게 연료를 공급했다. 아, 살 것 같군. 아마도 아까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했던 건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적당히 나른한 기분을 즐기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입김인지 담배 연긴지 알 수 없는 것이 마구 뿜어져 나왔고, 나도 딱히 그것을 정의하려 하지 않았다. …음. 입김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어릴 적, 입김이 나오는 것을 좋아했다. 그저 단순히, 내가 살아 숨 쉬며 존재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어땠더라? 솔직하게 말하면, 기억은 잘 안 난다. 그런 감상을 느끼기엔 겨울은 빌어먹게 추웠고, 살아남기 위해 주먹질을 하면 바로 거칠한 손등이 까져 피가 났으며, 얼굴 끝에 달린 코와 귀가 타듯이 아파왔기에.
 
겨울은 아름다운 계절이며 동시에 살아 숨쉬기 힘든 계절이다. 고요한 겨울의 소리는 내게 안정을. 느리게 흐르는 겨울의 향기는 망할 그 기억들을 상기시킨다. 이제는 거의 남지 않았지만 남은 감정만으로 정신을 좀먹는 그런 기억들. 
 
하지만 그 기억들을 온전히 원망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나를 살아가게 해주는 연료가 되어주었고, 어떤 때는 캄캄한 어둠 속 길잡이가 되어주곤 했으니까. 선도 악도 아닌 기억들이다. 애초에 선이란 것이 항상 선일 순 없으니까… 악도 물론 그렇겠지만. 
 
이런, 담배를 다 태워가니 또 이상한 생각들이 다 나네! 
 
하지만 나는 떠오르는 상념을 막지 않았다. 가끔씩은, 이런 것도 필요할 거야… 아마도? 하하! 
 
이번에는 멀쩡한 장갑을 그냥 벗겨보았다. 잔뜩 몰려있던 그날의 나는 가려져 있는 것을 나의 치부라고, 끔찍하게 여겼지만… 사실은 어떨까? 음, 좀 더 생각해 보자. 
 
어릴 적 냈던 손의 흉터는 많이 옅어졌다. 이젠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집중하여 관찰해야 보이는, 아주 옅은 흉터. 잘 보이지도 않는 흉터를 자세히 보며 나는 애꿎은 기억만 더 파헤치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재생력이란 대단하여서, 아픈 날의 상처 따윈 쉽게 지워버리고 만다. 
 
겨울날 내린 눈에 온 세상이 지워지듯, 내 흉터도 점점 사라져 간다. 이젠 그냥 잊으라고, 보려고 노력해야 보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소리치듯 내 몸은 아버지를 점점 지워만 간다. 그것이 내 몸이 생각한 내가 살아남는 방법인 걸까? …나도 좀, 잊고 싶은데.



내 육체는 이제 어릴 적 기억을 잊었다. 나는 신기하게도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다. 분명 내가 지금 서있는 장소는 화사한 유채꽃밭이 아닌 콘크리트로 된  차가운 길 위인데 정신은 전혀 성장하지 못한 것만 같았다. 






…억울해.






정말 너무 억울했다! 기억이라도 지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건 분명 담배를 다 피워서 일 거야. 나는 필터 앞까지 전부 타버린 담배를 신발 밑창으로 대충 지지곤 새로운 담배를 꺼냈다. 뇌에 행복한 가스를 주입하자. 이런 생각 따윈 하지 말자! …하지만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의 뇌는 점점 더 깊은 주제로 생각을 전개하고 있었다. 생각조차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만? 난 살짝 부조리함을 느꼈지만 나의 머리의 의사를 존중하고 그 흐름에 정신을 맡겼다.
 
…사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억울할 것도 없었다. ‘콜린스’라는 성을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직 버리지 못한 내 미련을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온갖 불법적인 루트로 입국한 이 나라에서, 나 자신을 증명할 방법도 없는 이 나라에서 이름 하나쯤 바꾸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나의 아버지가 내게 부여한 이름을 버리지 못했다. 가장 쉬운 것을 하지 못했다. 나의 근원이며, 나의 이유, 나의 삶이 되어주었던 그의 첫 번째 선물을 버리는 것은… 너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닌가? 정말 쉬운 일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만큼 쉬운 일을 아직까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난 용기고 자시고 아버지와 연결되지 않는 것에 큰 거부감을 느꼈던 것 같다. 아마도? 아…, 이럴 거였으면, 그날 나가지 않았으면 되었을 텐데. 이렇게 그리워할 것 같았으면 차라리, 따뜻한 품에 안겨 평생을…
 
그런 상념에서 날 깨운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로건.” 
 
그 녀석은 사나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난 그 따가운 눈빛을 살짝 피하며 생각했다. 꼬라지가 이게 뭐야,라고 생각 중이군. 

ⓒ화난망고님


눈앞에는 그 녀석이 있었고, 눈송이들이 마구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눈알을 굴려 그 녀석을 바라봤다. 대답하는 의미로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익숙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연락, 받으라고 했잖아.”
 
아무래도 오늘은 핸드폰 충전이 안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녀석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의미 없는 기다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약속 같지도 않은 약속을 지키려 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서. 
 
나는 그 말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추워.”
 
그 말을 뱉고 나서 뜬금없는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아, 생각을 지금 했어야 했는데! 그래, 평소에도 난 이 녀석의 말엔 잘 대답하지 않았는걸. 한 번 더 이런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 거야. 자기합리화로 점철된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눈앞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그 녀석은 조용히 두 팔을 벌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진짜로? 
 
난 몇 초간 고민하다가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그 녀석의 품에 안겼다. 정말 추웠기 때문이다.
 
…따뜻했다. 
 
살아있는 생물체의 온기가 주는 위안이란 생각보다 커서, 아무 말 않고도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어서… 그냥 계속 안겨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나쁘지 않았다. 
 
따뜻한 것을 접하니 내가 얼마나 차가운 상태였는지가 실감되었다. …앞으로 겨울에는 좀 따뜻하게 입고 다녀야겠어. 
 
우리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이라 다행이야. …나는 그 정막 속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약속 지켜.”
 
“…눈사람?”
 
난 긍정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면 이 바보 같은 동거인, 나탄 워커와 눈사람을 만들 것이다. 언젠가 봄이 되면, 눈사람은 녹아 사라지고 말겠지만, 그래도… 그 기억은 평생 남을 것이다. 그냥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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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시점이 언제일까요? 사실 생각 안 해봄….ㅇㅅㅇ

중간에 익숙한 대사?가 있죠? 재밋네요이거

겨울이 그리워서 써봣습니다 즐감하셧길 그럼 ㅃ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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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보고 싶은 거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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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8~ 중간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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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탄 워커 서사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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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5 겨우살이를 동봉한 갈색 아일렛 봉투

Date/ 2025. 3. 7. 15:08

2주 전쯤부터 거실에서 작은 빛을 반짝이던 트리…. 라고 하기엔 알전구 이외에는 장식이 없는 초라한 나무의 옆 테이블에 갈색 아일렛 봉투가 있다, 붉은 열매가 달린 겨우살이 줄기가 동봉된 채.


로건 콜린스에게.

어느덧 함께한 두번째 해를 맞이 하겠군요, 당신에게 쓰는 첫 편지입니다, 나름대로 크리스마스 기념 변덕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간 로건 씨가 제게 품은 것은 어색함과 불만이 대다수라고 생각하기에 최근의 대화로 어느정도 해소가 되셨으면 좋겠지만. 사실 저는 로건 씨가 원하는 것을 모르겠습니다, 저도 로건 씨를 이해할 수 없고 로건 씨도 저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행복하진 못하시더라도 차가운 길거리에 본인을 유기하지 않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성에 찰 정도는 아니지만 미지근한 온기는 나누어 드릴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편지조차 귀찮다고 던져놓으셨을 것 같지만, 부디 발견하시길 바라며. 메리 크리스마스.

나탄 워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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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란

나탄이 설정상 크리스마스를 챙기는 편이라 (사유: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마켓 구경하는거 좋아했음)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1시간 컷 조각글 썼던건데 백업 안 한거 이제 발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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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고해성사

Date/ 2025. 2. 25. 23:33

주의!! 료나 정신적료나 정신뼝 부자근친 그리고 중이병같음 자캐코패스존나 (ㅜㅜ)
 


 
 
 아버지는 내 전부였다.
 
 어머니는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그리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아버지를 더 소중히 하기 시작했다. 내가 5살쯤 되었을 때 그 감정은 더욱 커져서 나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아버지의 생일과 같은 날에는 항상 엉망진창인 글씨로 적힌 편지를 건넸고 아버지가 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시체를 버리는 일, 마약 거래의 연락책이 되는 일, 그리고 그 날의 일까지 전부…. 
 
 젠장, 이거는 일단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자. 이무튼 나는 코츠월드에서 자랐다. 나는 유채꽃과 매년 광관객으로 붐비는 그 도시에서 범죄자로 성장해갔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노란색의 유채꽃과 대비되는 인생을 살기를 12년, 나는 청소년이 되었다. 청소년은 가족보다 친구가 더 소중하다고 하던가? 나에게는 친구와 우정은 없었으며 가족,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가 최우선 순위였으니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깨닫는 것이지만 나는 정말이지 아버지를 사랑했다. 사실은, 나는 아직까지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같다. 유년시절의 기억과 숭배와 같은 사랑이란 감정이 그렇게 쉽게 옅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열 두살, 4월. 유채꽃은 활짝 피었지만 날씨는 풀리지 않아 추운 봄날이었다. 그 날도 아버지의 부탁, 그러니까 마약을 고객에게 건네고서 소파에 앉아 명부를 작성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수줍게 말을 걸었다.
 
“아버지이…. 저어, 다녀왔어요…!”
 
 아버지는 명부를 작성하던 손을 멈추곤 나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답했다. 
 
“…오 그래, 우리 로건. 잘 다녀왔니? 넘어지진 않았고? 아, 윌이 뭐라던?”
“그러니까, 다음에도 같은 걸로 부탁한다고 했어요. 다음주가 좋을 것 같다고…”
 
 그리고 넘어지진 않았어요. 넘어질 뻔 했지만… 작게 덧붙였다. 아버지 또한 가족에게 헌신적이었으며, 사랑이 고픈 나에게 사랑을 주며 성장시켰다. 나는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사랑한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숨긴 채 아버지가 묻는 것에 대해 충실히 답했다. 물론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것을 곧잘 알아차리고 그에 응해주곤 했으니까… 아버지는 점점 다가오는 나를 눈치채곤 팔을 벌리며 이렇게 말했다. …자아, 로건! 이리와서 아빠 좀 안아주겠니?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바로 그것을 바랐다는 듯 네에…! 하고 답하며 따뜻한 아버지의 품에 달려가 안기고 마는 것이다.
 
 아버지의 품은 정말 따뜻하고 커다랬다. 본 적도 없는 바다가 이런 것일까, 하며 감히 생각해보고 마는 그런 품이었다. 한참을 안겨있다 묻혀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아버지를 바라봤다. 내 시선의 끝에는 나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다. 귀가 화끈해지고 어째서인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혼자서 부끄러워 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사랑스러운 아들, 로건…. 아빠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줄 수 있겠니?”
“네…! 당연하죠, 아버지가 바라시는 것이라면 뭐든…”
 
 내가 아버지의 물음에 답을 하고 난 후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윗 옷 좀 들어보겠니? 하고…. 나는 아버지의 부탁에 응하여 내 옷을 들어 올렸다. 아버지는 나의 드러난 복부를 살살 만지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조금 따금할 수도 있는데… 아빠를 위해 참아줄 수 있지?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당연하죠…! 아,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아버지는 자애로운 미소를 살짝 짓더니 주머니에서 면도칼을 꺼냈다. 그러고는 날을 세워 내 배에 서서히 가져다 댔다. 날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아버지의 체온으로 따뜻해진 날은 꽤 깊숙히 파고 들어서는 천천히 글씨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E, 두번째로는 L…. 아팠지만 나는 아버지가 적고자 하는 바를 눈치챘다. 정신을 차리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글씨가 새겨지는 황홀한 고통 속에서 버티고 있으니 어느샌가 아버지는 글자를 모두 쓰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내 시선을 거두곤 거울을 들고와 나에게 말을 걸며 나의 배를 보여주었다. 자, 어때? 마음에 드니, 로건? 거울로 보니 내 배에 새겨진 것은… 예상대로 ELI COLLINS.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나는 식은땀과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을 느끼며 아버지의 말에 답했다. 네에…. 정말 마음에 들어요…. 답을 하고 상처가 아프고 화끈거렸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정말 기쁘다! 라고. 그 당시에는 정말 기뻤다. 온갖 용언을 덧붙여도 뭐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 기뻤나? 아니, 그때는 그런 생각마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동안 착한 아이로 지내온 나를 위해 선물을 하사하며 나와의 결속력을 높였다. 그리고 혈연이라는 관계를 더 단단히 했다. 
 
 사실 그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말을 몇마디 더 한 것 같았지만 그 뒤로 쓰러져 고열과 감기에 시달렸다는 것 빼고는. 정신을 차릴 때 마다 아버지가 나를 간호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그러면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상처를 낸 것은 완전히 잊고서 바보같은 웃음을 짓고 마는 것이다. 순간적인 충격과 얇은 옷으로 추운 봄을 버틴 것이 모여 감기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상태가 완화되어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졌을 때는 4월이 다 가고 5월이 된 때였다. 내가 나았을 때 아버지는 크게 안심하더니 미안하지만 밀린 일을 처리하러 간다고하며 집 밖으로 나갔다. 나는 아버지가 나가자 마자 거울로 내 배를 확인했다. 그날의 기억은 환각같은 것이 아니었다. 확실히 내 배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흉터를 살살 만졌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와 함께 없어도,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는 느낌…. 나는 기분이 확 고양되는 것을 느끼며 곧장 집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집 앞의 유채꽃밭을 바라봤다. 마치 세상이 하늘과 노란색 유채꽃만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보고 있을까? 나와 아버지는 연결되어 있으니까… 분명 아버지도 이 경치를 눈에 담아내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드물게 날씨가 좋아 햇빛이 들었고 구름도 해를 가리지 않았다. 요즘은 좋은 일 만 생기는 것 같다고, 나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좋은 일이 계속되면 나쁜 일이 찾아오기 마련이라… 나는 그런 진리조차 잊은 채 눈 앞의 경치를 담아내는 것에 바빴다.
 
“예쁘다….”
 
 늘 보던 풍경이지만 아름다웠다. 새삼 그렇게 생각했다.




*




 나쁜 일은 꽤 빨리 찾아왔다. 그 일 이후로 나도 내 몸에 무언가를 새기고 싶다는 욕망이 끊이질 않아서… 식탁 위에 항상 놓여져 있는 아버지의 면도칼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일이 많아졌다. 그때의 아버지는 내가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 바라보고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과 그 자신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연결시킨 도구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저, 저 칼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무의식적으로 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잠든 새벽에 깨어나 미리 식탁에서 가져온 면도칼을 잡았다. 원래는 아버지의 방에서 함께 자지만, 이것을 위해 오늘은 혼자 자고싶다고 거짓말을 하고 거의 쓴적 없는 나의 방 침대에서 잤다. 나는 내 책상에 앉아 오른손으로 면도칼을 잡고 왼쪽 손등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상처가 난 손등이 쓰라리고 화끈거렸지만 괜찮았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 아버지의 면도칼에는 다시 피가 묻었다. 이번에는 내 오른손에도 피가 묻었다. 엉망진창인 글씨체로 글자를 새긴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침은 밝아와 햇빛이 슬금슬금 들어왔고, 가장 절망스러운 점은아버지도 나의 뒤에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집중한 탓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돌아봤다. 아니, 돌아보려고 했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잡아 내가 뒤를 바라보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강압적인 모습의 아버지는 처음이었다. 
 
“아, 아버지?”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내 부름에 응하지 않더니 시간을 두고서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로건. 대체… 무슨 짓을 한거니?”
 
 아버지는 아마도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그냥요…. 아버지를 사랑하니까, 그래서—”
“—아니, 로건. 그러니까, 너는 그냥 내가 시키는 것만 하면 돼…. 그게 아빠를 위한 것이잖아. 안 그렇니? 하아, 로건…. 나의 로건. 너는 내 것이잖아, 그렇잖니? 나는 내 소유물이 소유물을 망가뜨리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아. …실망이구나, 로건.” 
“아…. 그, 그러니까 그게… 네….”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입을 떼고 싶었던 부분이 몇몇 있었지만 마지막 실망이라는 말에 그런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좋은 아들로 있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실망이라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노력해서 쌓은 관계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나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을 때, 아버지는 나를 그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렸다. 아버지는 우울해 하는 나를 품에 안고 욱해버렸어, 미안하구나. 하고 사과해왔다. 그 말 한마디로 아버지가 전에 한 말은 전부 잊어버린 나는 피로 범벅된 손으로 아버지의 등을 끌어 안았다. 나는 너, 너무 무서웠어요…, 따위의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정말이지 바보같았다. 
 
 그 이후에도 전과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아버지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뭐든 하기, 아버지와 함께 시간 가지기, 아버지를 사랑하기…. 뭐 이런 것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니 4년이 훌쩍 가 있었다. 나는 16살이 되었고 아버지와 나 사이의 관계는 여전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4년동안 묻어뒀던 아버지의 소유물 발언이 기억의 저편에서 슬슬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했던 소유물이라는 건 대체… 나를 의미하는 건가? 나는 소유물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 그 자체로 있고 싶어….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이 하나 떠오르자 아버지가 내게 부탁하는 일도 보통의 일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코츠월드는 그렇게 폐쇄적인 동네가 아니니까. 다른 가족이나 아이들을 보면 내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아버지와 같이 있고싶어서 합리화했다. 
 
 그래서, 집을 나가기로 했다. 
 
 다짐한 것은 곧장 하는 성격이라 그런가, 집을 나가는 것은 바로 다음 날 새벽으로 정했다. 그날 밤은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보내는 밤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을 마음껏 느끼며 잠에 들었다. 떠나고 싶은 마음과 떠나고 싶지 않은 양가감정이 들었다. 나는 깨자마자 몸을 깨끗하게 씻고 미리 싸놓고 숨겨둔 짐을 챙겨 아버지가 누워있는 침대 앞으로 갔다.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역시 떠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내 마지막 반항이니까…. 나는 아마 마지막이 될 굿바이 키스를 아버지의 이마 위에 했다. 항상 아버지가 외출하기 전에 하던 그 자리 그대로. 이번엔 위치가 바뀐 채였다. 나는 아버지가 깨어나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며 현관문을 잡았다. 그리고… 안녕히계세요,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절대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




“씨발… 잠 다 깼네….”
 
 가끔 어린 시절의 꿈을 꾼다. 항상 맹목적인 사랑을 하는 로건 콜린스,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일라이…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통제적인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엔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곤 정말 잘 따랐지…. 나는 이 꿈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잊을 때만 하면 꾸는 꿈은 이젠 너무 질렸다. 
 
 주인공의 불행한 과거를 나열하는 싸구려 B급 영화도 아니고, 내 인생이 이정도 밖에 안됐나…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담배는 아버지가 싫어할텐데’같은 바보같은 생각이나 했다. 나탄 그녀석이 본다면 나가서 피우라고 하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서 담배빨 기력밖에 안 남아있기도 하고….
 
 내가 내 손등의 흉터를 치부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내가 나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 아니…. 아버지의 소유물에 상처를 내는 것이 나와 아버지 사이에서는 금기의 일이었기 때문이겠지. 나는 성실한 신자였고 아버지는 그런 신자의 유일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금기, 그러니까 ‘I LOVE YOU DADDY’ 는, 아직도 내 손등에 흉터라는 형태로 남아있다. 확실히 나의 사랑은 자기 파괴적인 성격을 가졌다. 손등에 흉터를 새긴 날 부터 확신했다.
 
 아버지는 하나의 신이며 나는 그를 따르는 한 명의 순례자이다. 항상 이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이런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러면 나는 또 아버지라는 신의 순례자가 되어서 나의 신을 가슴 깊이 숭배한다. 나면서부터 새겨진 혈육이라는 존재는 혈육이라는 것 이상으로 나에게 영향을 줬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한다. 아버지는 나를 아직 찾고 있을까? 내가 16살 겨울에 코츠월드에서 런던으로 떠나 아버지에게 배운 깡패짓을 하며 지냈을 때도, 영국을 떠나 메텔라 시티로 온 지금까지도…. 나는 아직 아버지에게 사로잡혀 있다. 그럼 나는 이렇게 아버지에게 기도를 올린다. 아버지, 정말 사랑합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가끔 정말 이 생각으로 잠이 오지 않을 때에는 편지를 쓰곤 한다. 글씨를 쓰는 것이 익숙치 않아 그때와 거의 같은 글씨체와 그때와 같은 아버지라는 신의 숭배로 가득 찬 편지를. 나의 신에게 직접하는 고해성사와 같은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태워서 없애 버리곤 한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은 이 바보같은 고해성사는 계속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마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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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큼..후기.

배에 이름쓰는 거는 영화 그것<<보고…감명받아서 썻어요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윰님도 기회되시면 그것봐보세요!^^ 넷플에잇삼

손등에 흉터내는거 쓸때 너무 괴로웟삼 너무 중이병같아서…

그리구 옛날에 올린 로건 비설 쪼가리 소설은 잊어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설정을 갈아엎어서 아빠가 로건에게 손을 올리는 일은 없어졋어요ㅜㅜ 

그리고 로건이랑 아빠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는 없엇어요ㅜ 글을 너무 헷갈리게쓴거같애서………

퇴고 안함(쪽팔려서) 뒤로갈수록 약간 좀 내용 이상해지는거 양해바랍니다

후기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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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겨울은 싫어하지 않는다

Date/ 2025. 2. 25. 22:37

 겨울은 싫어하지 않는다. 날리는 눈이나, 살을 에는 추위, 적막 같은 게 나쁘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좋으니까. 스노 글로브에 갇힌 물건이 된 기분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담벼락에 기대어 양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눈을 감고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던 정적은 익숙한 신경질적인 구둣발 소리에 얼마 안 가 깨졌다.
 
 나탄 워커는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일찍 왔네. 아이씨, 깜짝이야. …눈사람도 아니고 꼬라지가 왜 그따위냐? 아, 이거…. 인사를 하고 나서야 제 상태를 파악한 듯 몇 차례 본인 옷의 눈덩이를 털어냈다. 됐지? 응. 로건, 한 겹 정도는 더 입고 가. 이미 돌아가는 상황에 말해봤자 늦은 말이라는 걸 알지만 잔소리하곤 본인 방으로 곧장 돌아갔다. 환복 후에야 손끝이 조금 빨간가, 제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반복하더니 이내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이정도 동상이면 금방 나을 거고, 급한 일도 없고…. 밖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인지 몰려오는 어지러움에 눈을 감았다.



-



 그러니까, 지금이 몇 시지.
 형광등을 켜고 잔 탓에 시간 감각이 이상했다, 몸도 눈사람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을 것만 같고, 와중에 목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부서진 CD 같았다. 아마도 또 감기 몸살이겠지. 굳이 걸어둔 외투 주머니의 휴대전화를 가지러 가기보다는 암막 커튼을 들춰 창밖을 내다보자 검은 설원이 눈에 박혔다. 새벽인가, 더 잘까…… 약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됐어. 다시 눈앞이 암전됐다.
 
 …탄, …탄 워커. 자냐?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노크 소리 따라 울리는 골은 덤이었고. 몸을 일으켜 바닥에 발을 딛은 후 나간다고 말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안 자면 답 좀 해라. 이거 누가 주고 갔다고. 응, 미안…. 아무 데나 두고 가. 목이 제 기능을 하긴 했나, 싶을 정도의 쇳소리를 내고는 다시 드러누웠다. 나탄에게는 아플 때 할 수 있는 행동이 많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쓰레기 같은 몸 상태를 이끌고 일을 하거나, 증상에 따른 약을 먹고 수면제를 먹은 후 자기였으니까. …야, 또 자냐? 뭔데, 무시하기로 결심했냐? 시끄러워, 나가. 피로 때문에 눈꺼풀이 무거워 제대로 노려보았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뒤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느릿하게 협탁을 뒤졌지만, 감기약은 보이질 않았다, 감기에 걸린 것도 한참은 된 일이었으니 채워 넣는 걸 까먹은 건가…. 수면제만 먹어도 어느 정도 낫겠지. 수면제를 털어 넣고 나서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암흑이었다. 버릇적으로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려 더듬대다 보니 손끝에 비닐봉지가 닿았다. 의아함을 느끼며 봉지를 열자, 감기약 두 개가 들어있었다. 로건이 쓸데없는 짓을 한 건가…. 그래도 최악은 면하기 위해 거실로 몸을 끌고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로건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비아냥댔다. 뭐야, 깼냐? 죽은 줄 알았다. 약, 고맙.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기침에 가로막혔다. …약 고마워. 한참 기침을 하고 난 뒤에야 인사를 하고 흐느적대는 발걸음으로 물을 떠서 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가벼운 현기증에 휘청대는 바람에 컵의 물을 반절 정도 쏟았다.
 
 뭐하냐? 가지가지 한다….
 내가 치울게.
 됐다, 네가 지금 뭘 할 수 있다고. 도울 거면 네가 제일 방해니까 방으로 꺼져.
 
 내 잘못인 건 맞았으니 잠자코 방으로 돌아가서 침대에 늘어지듯 기대어 앉았다. 약 덕분에 몇 시간은 잤을 터인데 여전히 엉망인 몸 상태에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로건이 불쑥 방에 쳐들어왔다. 뭐라 하기도 전에 협탁에 탁, 소리를 내며 스프와 온수가 담긴 컵이 있는 쟁반을 내려놨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만 교환하다 로건이 먼저 참다못해 쏘아붙였다. 뭘 멀뚱거리고 있냐? 기껏 먹으라고 해왔는데. 이것도 못 먹냐? 솔직히 말하자면, 먹을 수 있고 말고를 넘어서 이렇게 하는 게 의문스러워서 채근한 것이었다. 항상 로건은 의문을 만들어 냈으니까…. 굳이 답하지는 않고 인스턴트 스프와 약을 먹는 동안 로건은 방을 둘러보는지 한참 책장에 시선이 머물렀다. 로건, 다 먹었는데. 로건이 쟁반을 챙겨서 나갔다. 이것도 변덕 중 하나인가.
 
 잠자코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며 앉아 있자니 다시금 방문이 벌컥 열렸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로건이 제 방인 양 자연스레 허락도 없이 침대에서 뒹굴대는 로건을 보자니 이전의 감상 같은 게 백지가 됐다. 로건, 나가. 싫다면? 감기 옮을걸. 그래서?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침대 한편을 여전히 차지하고 태연히 누운 채로 눈만 굴려 시선을 마주쳤다. 역시 마음 가는 쪽의 변덕을 부려대는 것도 평소대로구나…. 약기운에 한참을 꾸벅대다 다시 침대에 웅크려 누웠다. 야, 나탄. 밖에 또 눈 온다. 마음만 같으면 이런 날에 나가서 실컷 싸우고 오는 건데, 어떤 바보가 눈 맞고 다녀서 이딴 짓 한다고 나가지도 못하고…. 듣고 있냐? 나탄을 쿡쿡 찌르자, 몸을 웅크리면서 짧게 신경질적인 침음을 흘렸다. 애초에 곤히 잠든 사람한테 이래봤자 답도 안 할걸 알지만, 무료함에 한참이나 성가시게 굴자 나탄이 무어라 웅얼댔다.
 
 …죄송해요. 제 잘못이에요. …했어요.
 이 새끼는 또 뭐라 하는 거지? 뭐 이딴걸로? 그 후로도 나탄이 중얼대는 걸 듣다 못 한 로건이 깨우자 여전히 잠에 절여진 상태로 중얼댔다. 기분 상하게 해서 죄송해요. …헛소리 적당히 해라. 로건과 눈이 마주치자 희미한 미소가 잠깐 스쳐 지나갔다. 저 쓸모 있는 사람이 될게요, 그러니까….
 
 나탄은 무의식중에서 과거의 말을 잔뜩 토해냈다. 잠든 바람에 끝말은 듣지 못했지만 무슨 말일지는 알 법했다. 이 새끼는 왜 꿈에서도 얌전히 굽신대는 거지? 괜히 치밀어 오르는 짜증 때문에 간신히 몰려오던 잠도 깰 것만 같았다. 아! 진짜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안 되는 새끼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탄은 한참 동안 깨질 않았다. 가끔 버릇인지 타인과 닿으려고 더듬대면서도 막상 확인하고는 얌전해지기도 하고, 인상을 곧잘 찌푸리기도 하고…. 쓸데없는 버릇을 세다 보니 다시금 잠이 쏟아졌다.



-



 로건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커튼 틈으로 비집어 드는 햇살 한 줄기도 없는 어둠이었지만 확실한 아침이었다. 아직도 자냐? 회복이 꽤 되었다지만 잘 봐줘 봤자 부서진 CD에서 흠집이 잔뜩 난 CD로 격상된 느낌이라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던 나탄이 답 대신 몸을 일으켜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신했다.
 
 상태는 이제 좀 괜찮아졌어, 더 이상 내 방에 안 와도 괜찮아. 보답은….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이제 아침이니까.
 글레이즈드 도넛 한 상자.
 …샌드위치 만들어줄게.
 
 반론하는 로건을 뒤로 한 채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겨 속 재료를 준비하고 손질한 사과를 한 쪽 베어 물며 생각했다. 여전히 똑같은 날이 반복된다. 낙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어쩌면…. 나에게도 돌아갈 곳이 생긴 것일까? 내가 돌아가야 하는 곳은…. 나탄 워커는 무른 이상을 느릿하게 되새김질했다. 미처 도려내지 않은 사과씨가 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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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란입니다…. 캐해는 이 때 기준으로 했어요 ^^*)> 너무 안 써지기도 하고 고치는데 오래 걸려서 언제나 그렇듯이 얼렁뚱땅 잡탕입니다. 캐해 싹 틀리고 보고싶은 장면만 써서 거의 2차네요… (편집자 권한 허용해놔서 캐해 틀린거 고치셔도 됨) 오늘도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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